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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연구실

요가와 명상 : 하타요가에서 명상의 의미

 

  하타요가 수행과 內觀 (마음 알아차림)

  대중적인 명상법이 관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하타요가는 육체적인 수련이라는 선입관이 만연해 있다. 더불어 Ys로 대표되는 고전요가는 라자요가로서 명상의 요가라고 인정하면서, 동일한 수행차제를 가지고 있는 하타요가는 육체적 수련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하타요가에 대한 오해는 하타요가 문헌들이 대부분 생리학적 원리를 강조하면서 요가행법을 위주로 하여 서술하는 경향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여기서 ‘생리학적’이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인상은 하타요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충분히 오해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타요가의 생리학은 서구의 해부학적 생리학이 아니라, 철저히 마음 작용에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미세신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이다.


  현대인들은 우리 몸을 정지한 대상으로서 해부학적 신체인 거친 육체(sthūla-śarīra)로 바라본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는 살아가는 생명체로 생각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몸에 대한 생리학적 태도는 죽은 시체를 해부해서 얻은 결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하타요가를 서양의 해부생리학이나 근골격 해부학, 신경 체계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매우 현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고대 요가수행자들이 그러한 개념으로 요가를 이해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단어들 또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心)과 몸(身)이 매개하고 있는 근본인 prāṇa의 정신생리학적 원리에 따라 성립된 요가수행 체계를 氣學의 원리를 배제한 그러한 접근 태도는 본질적인 이해가 불가능하다.


  하타요가는 언제나 생동하는 미세한 기와 마음이 결합된 미세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수행자는 자신의 내면의 변화와 잠재적인 생명력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나디의 흐름은 심리적인 면을 동반하는 생명에너지의 현상인 만큼 모든 인간 안에서 언제나 작용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직접 체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서양의학이나 생리학 또는 해부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하타요가를 육체적인 수련으로만 간주하거나, 내관으로서 그 실효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대과학을 자신의 신념을 검증하는 도구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하타요가를 수행한다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지 못한 행위로 생각될 수도 있다. 인체 내에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 보여주길 바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너무나도 역설적인 태도이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이미 있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지 못하고 그것을 의심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생명력과 마음이 움직이는 맥관(脈管)인 나디와 나디들이 모이는 짜끄라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조건이다. 미세신을 구성하는 나디와 짜끄라는 끊임없이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생리학적 토대이기 때문에, 일체의 삶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현상으로서 체험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사실 나디와 짜끄라는 실제적인 내관(內觀)을 통해서 스스로 증험(證驗)하는 것이지 사상이나 철학, 신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하타요가는 호흡수련, 무드라와 반다 등 나디와 짜끄라 미세신 등 육체와 정신이 연결되는 원리들을 깨닫게 하여 외부로 향하는 감관과 마음의 작용을 내부로 되돌리는 정신생리학적 수련이다. 그래서 나디와 짜끄라가 요가의 기본적인 원리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내관함으로써 직접 지각(pratyakṣa)하는 방식으로 요가를 수련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외형적 실천만으로 요가를 규정짓는다면, 운동선수나 체조선수들이 뛰어난 요가수행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육이나 관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작용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나디의 흐름과 짜끄라를 내관하는 자가 하타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타요가는 수행자 자신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현상 자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현상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이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무엇보다 자기자신에 대한 內觀이 따르지 않으면 그 행법의 원리를 확증할 수 없을 것이다. 하타요가는 심신의 존재론적, 생리학적 원리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차제에 따라 실천하는 수행법이다. 또한 우주적 에너지의 운행규율과 체내의 운행규율이 함께 상응하고 있으며, 개체로서 인간존재가 우주적 질서에 이미 포용되어 있음을 직접 자각하는 수행이다.


  동양 경맥이론의 총괄이라고 할 만한 『奇經八脈考』에서는 “몸 안을 들여다보는 데 있어서 그 길을 따르는 것(내경수도內景隨道)은 오직 안으로 돌이켜 볼 수 있는 자(反觀者)만이 능히 살필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은 틀림없다.”고 하였다. 여기서 ‘反觀者’는 nāḍī와 cakra와 생명현상을 관조하는 자를 의미한다. 나디와 짜끄라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세밀하게 알아차려야 하는 하타요가 수행은 觀修行 없이 불가능하다. 하타요가를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면을 면밀하게 반조하는 관수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외적 대상에 얽매인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면 누구나 나디를 확인할 수 있다. 나디의 변화를 체험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직접 보는 방법으로서, 마음의 흐름을 보는 다양한 觀法들과도 매우 유사하다.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방식으로서 내관(內觀)은 거의 모든 영적 수행 전통들에서 공유하고 있는 마음수행법(명상)으로서 상호 공유 가능한 종교체험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Yogacūḍāmaṇi-Upaniṣad에서는 “자기 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에게 어찌 [요가의] 성취가 있겠는가?”라고 천명하였다. 따라서 “도교든 밀교든 요가든 그 어느 것을 배우려 해도 또는 그 어느 것을 수련하려해도, 그들이 표방하는 경계에 도달하고자 하면 몸과 마음을 도구로 삼는 것 이외, 즉 몸과 마음을 도구로 삼아 체험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에 의지할 만한 것은 없다.

  똑같이 몸과 마음을 운용하는 것이라면 그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오장육부나 신경 및 골격이 달라질 리는 만무할 것이다. 그렇다면 각 이론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야기되는 관념 및 감각상의 환각 이외에 실제로 다른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관점의 차이로 인한 느낌의 차이일 뿐 또 다른 이질적인 몸과 마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고 남회근은 단언한다. 이 뜻을 Anuttarayoga-tantra의 『金剛新論釋』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육체 또한 짜(rtsa, nāḍī, 經脈)∙룽rluṅ(Vāyu, 氣)∙틱레(Tilaka, bindu, 明点) 셋에 의해서 형성된다. 경맥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음에 있어서 반드시 맥도의 구조를 통달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육체의 맥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알지 못하면 바람의 흐름과 명점의 머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신금강身金剛의 질료와 원리를 깨치는 것이 바로 짜(經脈)의 진실을 깨닫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체내 경맥의 작용에 의거해서 마음에서 지혜가 발생한다고 <방편과 지혜의 딴뜨라>에서 설한 까닭이다."

  나디의 작용을 內觀한 요가수행자는 그 움직임을 뱀의 움직임과의 유사함을 발견하고 그것에 비유한다. 뱀이 제어되지 않으면 독의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디가 바르게 제어되지 않으면 수행자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 또한 뱀과 나디를 비유하는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purāṇa와 圖像에 등장하는 神들이나 성자는 머리 뒤로 올라가는 수많은 뱀들을 표현하고 있는데, 뱀들은 머리로 올라가는 1000(sahasrāra) 개의 나디들을 나타낸 것이다. Viṣṇu와 함께 그려지는 무수한 뱀들은 천개의 연꽃으로 상징되며 그것은 본래 하나의 몸통을 가지고 있다. 체내의 모든 나디가 정화되어 통할 때, 머리로 올라가는 나디들이 명확하게 드러나며, 머리 전체를 감싸고 머리 상부로 뒤덮는 나디들의 흐름은 뇌부(腦部)와 연결되어 머리 전체를 내외로 통하게 된다. 하타요가를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나디와 짜끄라의 현상을 내관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오히려 수행자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반드시 내관의 실천을 병행해야 한다. 


  Hp에서도 제2장 Prāṇāyāma의 주의 사항으로 ‘기의 격노’를 언급하고 있다. 적합하지 않는 수련에 열중하면 모든 질병이 발생하며, 氣의 격노로 인해 딸꾹질, 호흡곤란, 기침 그리고 머리와 귀와 눈의 통증 등 여러 종류의 질환이 발생하므로, 나디의 상태에 상응하여 적절하게 氣를 내보내고, 또한 나디의 상태에 상응하여 적절하게 氣를 가득 마셔서 채워야 하며, 또한 나디의 상태에 상응하여 적절하게 氣를 붙들어야 함을 경고하였다. 여기서 ‘적합하지 않는 수련’과 ‘氣의 격노’의 의미가 경맥의 원리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으나, 후대의 YchU에 ‘氣의 逆流’(pavana-vyatyayakrma)라는 말로 Prāṇāyāma의 부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prāṇa로 대표되는 生氣는 나디를 따라 규칙적으로 운행하며, 각각의 나디 또한 정해진 노선과 방향을 따라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반복해서 流注한다. 이러한 쁘라나와 나디의 운행 법칙에서 벗어나는 ‘적합하지 않는 수련’은 ‘빠바나(氣)의 격노’를 일으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행법의 외형적인 모방으로 하타요가를 수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드시 내관을 통해서만이 미세한 몸과 마음을 직접 지각(pratyakṣa)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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